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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아놀드 파머와 잭 니컬라우스의 숙명의 대결
  • 월간골프
  • 등록 2021-04-05 17: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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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이상을 함께 한 영원한 두 전설. 

 

‘킹’으로 불린 아놀드 파머와 ‘황금곰’ 잭 니컬라우스의 숙명 같은 첫 대결은 언제였을까.

 

1962년 US오픈이 열리고 있는 필라델피아의 오크몬드골프장. 아놀드가 독주하리란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물고 늘어진 선수는 오하이오 출신의 신참내기 잭 니컬라우스였다. 

 

이제 갓 22살의 프로 데뷔 1년 차로 이미 17차례의 PGA 대회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무명의 선수였다. 

 

반면 아놀드는 이미 5번의 메이저를 포함해 33차례나 우승을 한 천하무적이었다. 아놀드는 잘생기고 군살 없는 몸매를 지녔지만, 잭은 처비 보이(CHUBBY BOY)라 불리는 뚱보였다. 

 

아놀드의 팬들이 잭을 그냥 놔둘리 없었다. 아놀드와 잭이 처음부터 한 조를 이루자 “오하이오 뚱보야 물러가라”며 살기 어린 독설을 퍼부었다.

 

잭이 버디라도 했다가는 거의 폭동이라도 일으킬 만큼의 거센 야유와 방해가 극에 달했다. 추종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아놀드는 1, 2회전에서 잭을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3, 4회 전을 치르는 토요일. 야유와 공포스러운 와중에서도 잭은 아놀드에게 한 타 만 뒤져있었다. 이 한 점이 잭을 앞 조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해 주어 다행히 정면 대결을 피하도록 만들었다. 



젊은 시절 팔머는 자칭 '아니의 부대'라 불리는 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러나 아놀드의 팬들은 앞 조에서 출발한 잭마저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편을 나누어 일련의 무리들은 잭의 라운딩에 투입됐다. 하지만 잭은 야유가 심하면 심할수록 평정심을 찾고 아놀드보다 더 잘 치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은 오후 4시를 가리키며 4회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앞 조의 잭이 13번 홀에 다다르면서 어느새 아놀드와 공동 선두로 나서자 아놀드의 부대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잭이 퍼팅을 하려고 자세를 잡으면 주변의 땅이 흔들릴 정도로 발을 굴러댔다. 잭의 퍼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잭은 필사적으로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잭은 팔머와는 전혀 다른 파워풀한 스윙을 가지고 있었다. 


14번 홀을 걸어가며 잭은 2년 전 아놀드가 US오픈에서 우승할 당시를 떠올렸다. 아깝게 잭은 2위에 머물렀고,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잭은 조용히 아놀드의 목줄을 죄기 시작했다. 아놀드의 추종자들이 그를 방해하면 할수록 잭은 골프채를 불끈 쥐었다. 이번에도 기세에 눌려 우승을 헌납해 줄 수는 없었다. 

 

잭은 어린 나이 답지않게 평정을 찾고 있었다. 오히려 다급한 쪽은 뒷 조의 아놀드였다. 어느덧 18번 홀을 먼저 끝낸 잭이 283타로 선두에 올라있었다. 

 

아놀드와 공동 선두에 오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뒤이어 아놀드가 18번 홀 티박스에 섰다. 잘 맞은 드라이버에 이어 4번 아이언으로 한 세컨샷도 그린에 올렸다. 

 

볼은 홀 컵 3미터 정도에 붙었다. 아놀드가 버디를 잡으면 한 타 차로 승리였다. 마지막 그린 주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모든 아놀드의 군대들은 눈을 감았다. 

 

왕으로 군림하는 아놀드의 독주를 막으려는 어린 신출내기가 벌인 쿠데타의 전조였을까. 신중한 자세로 퍼터를 떠난 아놀드의 볼이 홀 컵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 만, 수십 만 명의 염원을 뒤로한 채 볼은 애석하게 홀 컵을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동타를 이루었고, 일요일에 두 사람만의 연장 18홀을 치러야 했다. 일요일 오전 경기 개시 전에 아놀드는 잭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 여기 와 있네.” 잭이 즉시 받아쳤다. “그렇게 높게 평가해줘 고맙소.” 

 

연장 18홀은 예상과 달리 잭이 주도했다. 결국 오하이오의 뚱보 잭은 아놀드의 홈구장에서 아놀드의 군대를 모두 몰살시키며 총사령관 아놀드를 3타차로 따돌리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아놀드의 군대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필드에 모인 그들 모두 넋이 나갔다. 어떤 이들은 풀밭에 앉아 목놓아 울기도 했다. 잭은 아놀드 파머를 보기 좋게 이겼을 뿐 아니라, 첫 우승을 메이저로 이루었다. 

 

홈 그라운드에서 천추의 한을 남긴 아놀드는 7월에 열린 디 오픈 2연패로 어느 정도 잭에 대한 상처는 만회했다. 4월의 마스터즈에서 우승을 하면서 최고 절정기에 있었던 아놀드가 만약 잭에게 US오픈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바비 존스의 뒤를 이어 62년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고 훗날의 골프역사가들은 회고하고 있다. 

 

2016년 고인이 된 아놀드는 평소 1962년의 US오픈을 가장 아쉬워했다고 한다. 아놀드에게는 다른 골퍼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팬 모임인 일명 ‘오빠부대’가 있었다. 

 

‘아놀드의 군대’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그룹은 아놀드 파머를 신봉하는 골수 팬들로, 아놀드의 애칭인 아니를 총사령관처럼 추대하는 절대 추종자들이었다. 

 

그만큼 아니는 5, 60년대 골프계의 아이콘이었다. 동네 아저씨같은 푸근함과 미소를 띠고, 시가를 문채 우스꽝스러운 스윙을 할 때면 아가씨들은 열광하며 쓰러졌다. 

 

그는 50년대 중반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의 안방으로 서슴없이 들어온 국민스타 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TV를 켰으며 아니를 ‘골프의 왕’이라 불렀다. 

 

‘강철왕’ 카네기를 연상시키는 강철 도시의 명성을 지닌 펜실바니아주의 피츠버그시. 1962년 6월의 일요일 오전 스틸 노동자 4명이 알레게니강을 따라 28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1958년형 쉐볼레의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신곡 ‘굿 럭 참( GOOD LUCK CHARM)’이었다. 

 

골프광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물러가고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한 지 6개월여가 지난 때였다. ‘아니의 군대(ARNIE’S ARMY)‘를 자칭하는 이들 노동자들은 오크몬드 골프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니의 군대로 분류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4명의 강철 노동자들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US오픈 결승에 오른 아니를 응원하러 가는 중이었다. 

 

당시에는 3, 4회전이 토요일 오전과 오후에 걸쳐 36홀로 치러졌던 관계로 US오픈 연장 18홀은 일요일에 진행됐다. 

 

1962년 US오픈이 열린 오크몬드 골프장은 아니의 집에서 40여 분이면 닿을 피츠버그 인근의 골프장으로, 그는 이미 십여 차례 이상이나 이곳에서 골프를 친 경험이 있는, 홈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놀드 파머.


게다가 수만의 골수팬들까지 자발적으로 동원됐으니, 아니의 팬들에게 그와 대적하는 선수들은 모두 적군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아니를 이기면 안됐으며, 오직 아니만 우승을 해야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아니는 절대 질 수 없는 신과도 같은 존재로 부상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연장전에서 아놀드는 막강한 추종자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잭 니컬라우스에게 패했지만, 그들의 충성은 상대인 잭 니컬라우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것이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국 골프의 양대 산맥으로 지낸 두 사람이었지만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이로는 발전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62년 아니의 군대가 보여 주었던 야유는 잭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으며, 오랫동안 두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벽으로 작용했다. 충성스러웠던 아니의 군대는 그들의 가슴속에 전설처럼 살다가 타계한 골프의 왕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

















글/이인세 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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