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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이방인들이 접수한 세계 골프
  • 월간골프
  • 등록 2022-01-17 17:41:35
  • 수정 2022-01-17 17: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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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즈에서 만난 세비와 버나드. 서로 굳은 악수를 하며 함께 미국을 점령하자고 약속을 하고 있다.

1979년 스페인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한 선수의 등장은 수십 년간 미국이 지배하던 세계 골프의 흐름을 통채로 바꾸어 놓는다. 

 

6, 70년대 미국은 국민스타 아놀드 파머와 잭 니컬라우스 2명의 걸출한 전설을 배출하면서 골프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이었다. 

 

난공불락이던 미국골프를 침공해 이방인 골프의 시대를 연 주인공은 세비 바예스테로스였다. 1917년 7월 18일 108회 디 오픈이 열리는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로얄 리덤 앤 샌 앤스’ 골프장. 

 

1926년 보비 존스이래 이 골프장에서만큼은 우승한 미국 선수가 없었던 관계로 출전한 미국 선수들은 심기일전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대회 첫날부터 잭 니컬라우스, 탐 왓슨, 헤일 어윈, 벤 크랜샤, 쟈니 밀러등 당대 최고의 미국 선수들이 선두그룹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대적하는 유일한 선두그룹의 유럽 선수는 3년차 신인이자 22살 풋나기인 골프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온 세비 바예스테로스였다. 

 

헤일 어윈이 68타, 벤 크랜셔 71타, 잭 니컬라우스와 탐 왓슨이 72타를 기록하며 선두그룹을 형성했고, 세비는 한 타 뒤진 73타였다.

 

반전은 둘째 날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65타라는 경이적인 타수로 세비는 선두 헤일 어윈에 2타 뒤진 2위를 기록한 것. 헤일은 몇주 전 US오픈을 우승했던 관계로 여세를 몰아 메이저 2연패의 꿈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 

 

3일째 경기에서 두 사람은 긴장한 탓인지 나란히 75타의 저조한 기록을 냈다. 마지막 4일째 여전히 스코어는 2타차였다. 



1979년 브리티시ㅣ 우승을 확정지은 18홀을 걸어가는 세비. 통산 5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했다.

 잭 니컬라우스는 1타차로 세비의 뒤를 쫒고 있었다. 우중충하고 변덕스러운 스코틀랜드의 날씨 탓이었을까. 선두그룹 모두 오버파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비만큼은 예외였다. 그 역시 드라이버 샷을 페어웨이에 올린 적은 거의 없었지만 용케 세컨 샷을 그린에 올리면서 파 세이브를 하면서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버디를 기록해 거의 원맨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뒤를 쫒은 벤 크랜샤도 그러나 대의를 거스를 수는 없는 듯 세비에게 3타를 뒤지고 말았다. 그렇게 세비는 데뷔 3년차에 디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유럽대륙 출신 선수로는 72년만에 우승하는 기록을 갖게 됐다.

 

그는 단숨에 스타가 됐다. 머뭇거림 없는 빠른 스윙, 과감한 결정, 미국의 월터 하겐 이후 구석구석을 과감하게 공략해 세이브 샷을 잘하는 재주꾼, 테니스의 스매싱 같은 드라이브 샷, 그리고 미남형의 호리호리한 체격은 스타 부재의 세계 골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린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미국에서의 우승은 절대 못 할 것이라는 미국 언론을 비웃듯 세비는 이듬해인 1980년 마스터즈에서도 최장의 비거리와 정교한 숏게임으로 보란 듯이 우승을 해버렸다. 

 

미국 골프로의 정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1983년 마스터즈에서의 우승, 1984년 세인트 앤드루스의 디오픈에서 다시 우승을 하면서 세계 1위로 랭크 된 그는 유럽에서 온 이방인의 선두주자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79년 홀연히 나타나 세계를 놀라게 했던 스페인의 세비 바예스테로스. 미국 상륙의 선두주자였다.

 그를 기점으로 미국 골프의 기세에 눌려 변방으로 전락했던 유럽 골프에서 대규모의 후발주자들이 속속 미국으로 입성을 시도한다. 

 

호주의 그랙 노먼, 영국의 닉 팔도, 스코틀랜드의 샌디 라일, 웨일즈의 이안 우스남, 그리고 독일의 버나드 랭어까지 일련의 유럽 선수들이 차례로 미국 골프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6인조 이방인들이었다. 유럽 골프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세비는 그러나 메이저 승수에 있어선 세간의 바램을 채우지 못하고 5승에 그쳤다. 

 

2007년 은퇴를 한 그는 후배 양성과 유럽 골퍼들에게 로망이 되고자 했으나 2008년 비행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뇌종양 진단을 받고 3년간 투병 생활 끝에 2011년 54세의 나이로 아쉽게 작고하고 말았다.

 

잭 니컬라우스가 전성기를 지나는 70년대의 미국 골프는 사회 전반에 걸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반전 운동과 히피의 출현, 자조적인 분위기에서의 레저 스포츠 공백으로 인한 골프 산업의 부재 등으로 미국이 주도하던 골프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깊은 휴식기에 들어간다. 

 

물론 헤일 어윈이나 탐 왓슨 같은 훌륭한 미국 선수들이 있었지만, 미국 골프의 계보를 잇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에게는 스타성이 미흡하다는 지적이었다. 

 

미국 골프의 이 같은 공백을 틈타 1979년 세비 바예스테로스의 등장 이후 유럽 선수들은 80, 90년대 2세기 동안 미국과 전 세계의 골프를 이방인들의 무대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유럽 6인방이 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동안 PGA와 유럽 등지에서 거둔 승수는 3백 77승이었으며, 메이저의 승수는 모두 18승이었다.



80,90년대를 풍미했던 유럽 5인방. 1991년 마스터즈대회 참가 기념촬영. 이들은 모두 마스터즈 대회에서 우승하며 미국을 점령했었다.

 세비 바예스테로스가 메이저 5승을 포함해 통산 91승,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의 작위까지 받은 닉 팔도는 메이저 6승에 총 40승, 샌디 라일은 메이저 2승 포함 총 28승, 이안 우스남은 메이저 1승에 총 47승, 그랙 노먼은 메이저 2승에 총 88승, 그리고 버나드 랭어는 메이저 2승에 총 83승을 기록했다. 

 

다만 이들이 아쉬워하는 점은 18승의 메이저 승수에도 불구하고 이들 6명 중 어느 누구도 US오픈만은 유일하게 기록하지 못했다. 

 

훗날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예 어니 엘스가 등장하면서 US오픈에서 우승, 목말랐던 그들을 갈증을 해소해준다.

 

유럽 6인방의 활약은 골프 역사에 큰 획을 그으면서 세계 골프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으나 1996년 타이거 우즈라는 ‘골프 황제’가 등장하면서 세계 골프가 한 사람에 의해 다시금 미국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세비가 등장한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동안 유럽 이방인들은 그렇게 세계 골프를 지배했다.












글/이인세 골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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